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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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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금정산성으로 올라가는 길 가을이 왔다 싶었는데..이미 가을이 저만치 가려고 하네요. 가는 가을 붙잡기 어려워 사진에 담아두었습니다. 사진은 몇 년 전 찍은 것입니다. 아직 지금 가을은 단풍을 머금고 있습니다. 더 도망가기 전에 단풍 구경하시며 세월이 흘러가는 자연의 색을 즐겨보시길 .. by 레몬박기자 레몬박기자 카메라여행 바로가기 ☞클릭 *이 글이 유익하셨다면 추천 하트 한 번 눌러주세요.
나무에 알처럼 생긴 이건 뭘까요? 나무에 새순이 돋는다. 그런데 이 커다란 알처럼 생긴 녀석은 뭘까? 사진 = 부산대학교 by 레몬박기자 레몬박기자 카메라여행 바로가기 ☞클릭 *이 글이 유익하셨다면 추천 하트 한 번 눌러주세요.
부산대학교의 명물 삼단토스트 부산대학교 정문 앞에는 삼단토스트를 파는 노점상과 가게들이 즐비하다. 할머니 한 분이 배고픈 대학생들을 위해 토스트를 삼단으로 만들어 판 것이 시발이 되어 이제는 이곳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다 삼단토스트를 판다. 10년 전에는 하나에 천원이었는데, 지금은 꽤 많이 올랐을 것이다. 그래도 배고프고 돈이 없는 대학생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보배.. 그리운 추억이 배여 있는 부산대학교 정문 사거리 .. 사진 = 부산대학교 by 레몬박기자 레몬박기자 카메라여행 바로가기 ☞클릭 *이 글이 유익하셨다면 추천 하트 한 번 눌러주세요.
가을 야경, 자전거가 있는 풍경 가을날 예저기 흩어져 촉촉히 젖은낙엽을 소리없이 밟으며허리띠 같은 길을 내놓고풀밭에 드어 거닐어보다끊일락 다시 이어지는 벌레 소리애연히 넘어가는 마디마디엔제철의 아픔이 깃들였다’ (- 노천명) 사진 = 부산 동래 한양프라자 앞 by 레몬박기자 레몬박기자 카메라여행 바로가기 ☞클릭 *이 글이 유익하셨다면 추천 하트 한 번 눌러주세요.
부산광복기념관과 순국선열애국지사 위패봉안소 부산 민주화공원에는 부산광복기념관과 순국선열 애국지사 위패 봉안소가 있다. 사진 = 부산 민주화공원 by 레몬박기자 레몬박기자 카메라여행 바로가기 ☞클릭 *이 글이 유익하셨다면 추천 하트 한 번 눌러주세요.
부산민주화공원에 있는 여러 기념비들 부산 민주화공원에 여러 기념비들이 있다. 민주투사이자 독립투사였던 최천택선생님의 기념비가 있고 호국유공자 기념비도 있고, 또 유비무환이라는 글귀가 있는 비도 있다. 그런데 유비무환이라 씌어진 비석 앞에는 이 비석을 세운 이의 이름이 지워져 있다. 누가 지웠는지는 모르지만 여기 민주화공원에 이름을 올려서는 안되는 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나 보다. 여긴 역사의 죄인이 그 이름을 새겨놓을 그런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진 = 부산 민주화공원 by 레몬박기자 레몬박기자 카메라여행 바로가기 ☞클릭 *이 글이 유익하셨다면 추천 하트 한 번 눌러주세요.
부산출신 독립운동가 최천택 선생의 기념비 최천택 선생은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민주 투사이다. 최천택(崔天澤)[1896~1961년]은 1896년 6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났다. 부친(최차구(崔此球))이 해운대와 가야 등지에 상당한 전답을 가지고 있어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안에서 자랐다. 최천택 선생은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때인 1912년 당시 금서였던 『동국 역사(東國歷史)』를 절친한 학우들인 박재혁(朴載赫)·김병태(金鉼泰)·김흥규(金興奎)와 돌려 가며 읽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돌린 것이 발각되어 10여 일간 구속되었다. 윤독회를 통해 결속을 다진 학우들과 함께 북로 군정서의 국내 연락을 담당하고 유사시 항일 비밀 결사대로 전환한다는 목적 아래 1913년 비밀 결사인 구세단(救世..
부산 민주화공원에 있는 소해 장건상 선생의 동상 장건상(張建相, 1882.12.19~1974.5.14) 선생은 서구 열강의 한국에 대한 침략이 본격화되어 민족적 위기감이 고조되던 1882년 12월 19일 경북 칠곡(漆谷)에서 장운원(張雲遠)의 네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명은 명상(明相), 호는 소해(宵海),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다음 해인 1883년 선생은 부산 좌천동(佐川洞)으로 이사하고 좌천재(佐川齋)라는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다. 얼마 후에는 신학문을 도입하여 운영하고 있던 육영재(育英齋)라는 서당으로 옮겨 공부하면서 신학문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선생은 1903년 서울에서 한성순보(漢城旬報) 주필로 있던 장지연(張志淵)의 주선으로 공립영어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신학문보다 한문에 치중했으므로 ..